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토 폰 비스마르크 (문단 편집) == 개인적인 면모 == [[파일:attachment/Otto.von.Bismarck.jpg]] 철혈재상의 강인하고 냉혹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상당히 [[감수성]]이 풍부했으며, [[신경쇠약]] 때문에 자주 [[과식]]했고 사망원인도 과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의외로 [[울보|눈물도 많았다]]고 한다. 아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울면서 자살하겠다고 말린 적도 있으며 [[보오전쟁]]의 보상 [[조약]] 체결을 둘러싸고 빌헬름 1세와 대립이 생겼을 때는 '''울면서 자살 소동을 벌여''' [[빌헬름 1세]]의 뜻을 꺾은 적도 있다고 한다. 한 번은 비스마르크가 "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사임하겠습니다!"라고 외치자 빌헬름 1세도 "제국에는 나보다 비스마르크가 더 필요하니 내가 퇴위하겠다!"고 맞받아쳤다. 어찌 됐든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가 설득하면 마뜩찮아 해도 들어주었기 때문에 빌헬름 1세가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비스마르크는 큰 상심에 빠졌다. 이후 [[빌헬름 2세]]가 자기 말을 안 듣자 똑같은 짓을 했는데, 빌헬름 2세가 무시하자 열받아서 '''"[[잉크]]병을 빌헬름 2세의 [[이마]]에 던졌다."'''란 카더라가 있었는데 이는 당시 [[찌라시]]의 보도였고, 실제로는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2세에게 모독에 가까운 구박을 받았어도 결코 예의를 잃지 않았다. 총리 임기 말년에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에게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대화를 하는지 일일이 문서로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자 뚜껑이 열려서 잠시 이성을 잃은 적이 있지만, 퇴임 이후에도 아들뻘 나이의 빌헬름 2세에게 훈계하려고 했지 한판 붙자는 식으로 대들진 않았으며 그리고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원하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했다. 두 전쟁 모두 중요한 전투에서 이긴 다음 고삐를 쥐고 원하는 것을 가져갔다. 1870년 독일 통일 이후 실각할 때까지 그의 정책 목적은 철저히 전쟁을 막기 위한 세력 균형을 추구하는데 있었다. 아이러니한건 [[빌헬름 2세]]와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황후의 결혼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지한 인물이 비스마르크였다. 원래 프로이센 왕실은 아우구스테 빅토리아가 공주가 아니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지만 빌헬름 2세가 결혼하겠다고 밀어붙혔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이 결혼으로 프로이센 왕실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가문과의 분쟁이 종식될 수 있을 것이라며 둘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기에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있었다. 자신의 미국인 친구 존 말트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식료품점 주인이 자기 일을 껄끄러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를 싫어했다.''' 말트리는 비스마르크의 대학 동창이었고, 이후 미국의 외교관이 되었다. 비스마르크와는 노년까지 쭉 [[편지]]로 교류했다. 왕년에 언어 공부에 심취했던 적이 있는 만큼 여러 가지 언어에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영어]]에 능통해 역시 영어에 통달한 [[이홍장]]과 만났을 때는 통역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